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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탕/목욕탕 이야기

[백과사전] 목욕탕(沐浴湯)?

by 동아지기 2015.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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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沐浴湯]

근대 생활시설로 1924년부터 시행된,

돈을 받고 여러 사람에게 목욕을 하게 하는 시설, 또는 숙박업소에서 편의시설의 일종으로 갖추어놓거나, 가정에서 목욕을 할 수 있도록 설비하여 놓은 시설.

[내용]

우리 나라의 공중목욕탕의 설립 기준과 영업에 관한 사항은 현행 「공중위생관리법」에서 그 세부 법령과 규칙이 제시되어 있다. 공중목욕탕에는 일반목욕장(공중탕·가족탕)과 특수목욕장(한증탕·증기탕) 등이 있다.

개항 이전 우리 나라의 가옥에는 목욕간(沐浴間)이나 목욕탕이 따로 없었다. 따라서 일반 서민들은 봄·여름·가을에는 내[川] 또는 얕은 강이나 호수 등에서 몸을 씻었고, 겨울에는 물을 데워 부엌이나 헛간에서 목욕을 하였다.

양반층은 서민들과 달리 목간통이라 하여 나무로 만든 둥근 욕조를 안방 또는 사랑방에 들여놓고 하인들이 운반해 온 더운 물을 끼얹는 방법으로 목욕을 하였다.

그러나 개항 이후 선교사를 비롯한 각국의 외국인들이 서울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 거주하면서 목욕시설의 불편함을 느끼게 되자, 가옥의 일부 구조를 개량하여 목욕탕으로 만들거나 처음부터 목욕탕 시설을 갖춘 가옥(주로 양옥)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근대적 수도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았던 당시의 목욕탕은 오늘의 목욕탕과는 크게 달랐다. 1920년을 전후한 개량한옥이나 일본식 가옥의 목욕탕은 밖에서 길어온 물을 큰 항아리에 담아놓았다가 수시로 물을 퍼서 쓸 수 있도록 간단한 샤워시설이나 이동식 간이욕조만을 설치하였다.

또한 쇠로 만든 큰 항아리(두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윗지름 1.2m 정도의 역원뿔형) 같은 욕조에다 물을 채워 넣고 밑에서 장작으로 불을 때서 데워 쓰기도 하였다.

욕탕의 바닥은 지면으로부터 약 한 뼘 정도(17∼20㎝)의 공간을 띄운 뒤 너비가 6㎝ 정도의 나무 판자를 1㎝ 간격으로 이어서 만들었다. 배수와 함께 지면으로부터 올라오는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개인주택의 목욕탕 시설이 조금씩 만들어지는 것과 함께 숙박업소에도 목욕시설이 갖추어지기 시작하였다. 1910년 이후 많은 서양인이 드나듦에 따라 서양인을 상대하는 호텔과 여관이 생기게 되었으며, 이러한 숙박업소들은 거의 모두 목욕탕을 구비하고 있었다.

다만 숙박업소의 규모에 따라 방마다 욕실이 딸려 있는 곳과, 각 방에는 없지만 크게 하나를 마련하여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곳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숙박업소가 대중탕을 겸하고 있는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대중목욕탕의 본격적인 발전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한국으로 많이 이주해오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기후조건 및 지형적 조건으로 자주 목욕을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 이주한 일본인들은 목욕의 불편을 느껴 공중욕탕을 설치하고자 하였으나 한국인들의 거센 반발로 쉽게 착수하지는 못하였다.

왜냐 하면 당시 한국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옷을 벗고 목욕을 하는 것은 천민들이나 하는 짓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 나라에 대중욕탕이 처음 설립된 것은 1924년 평양에서였다.

이 때의 공중욕탕은 부(府)에서 직접 운영하였으며 관리인을 따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욕탕 사용료의 수납, 시설의 보수, 욕탕 사용인원의 제한 등을 관리하였다. 서울에 공중욕탕이 처음 세워진 때는 1925년이었다.

8·15광복 이후 인구의 증가와 위생관념의 발전으로 사설욕탕의 숫자가 늘어나자 욕탕영업의 허가를 위한 시설규정을 제정하였으며, 한때는 도시민의 공중보건을 위한 복지시설로 시립공중욕탕을 설치하여 지방공무원이 운영, 관리를 맡기도 하였다.

현재는 신축 개인주택에 대부분 목욕탕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대중목욕탕도 차차 고급화되어 그 기능도 단순히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 일 이외에 휴게실의 기능 등으로 다변화되고 있다.

그리고 목욕탕의 시설과 기능에 따라 사우나탕·증기탕·찜질방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분류되어 불리고 있다. 1999년말 현재 대한목욕업중앙회에 등록된 업소는 약 8,000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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